정리를 안 하기로 한 사람

회의 노트는 엉망이다. 반은 일 얘기, 반은 나만 알아보는 낙서 같은 문장들. 언젠가 프로젝트별로 깔끔하게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벌써 십 년도 더 됐는데, 아직 그대로다. 정확히 말하면 정리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기로 한 거다. 그 뒤죽박죽 속에 가끔 보물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구름색 입고 싶어"

며칠 전, 같이 일하는 후배 디자이너가 옛날 노트를 넘겨보다 물었다. "실장님, 여기 '구름색 입고 싶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게 뭐예요?" 나도 한참 들여다보고서야 기억이 났다. 딸이 예닐곱 살쯤이었을 거다. 하원길에 손을 잡고 걷는데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그랬다.

"엄마, 나 내일은 구름색 옷 입고 싶어."

무슨 색이냐고 물으니 "몰라, 그냥 부드러운 색"이란다. 팬톤 넘버도 아니고 색 이름도 아닌데,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콕 박혀서 그날 저녁 노트 한 귀퉁이에 급하게 옮겨 적었다. 아이들을 직접 데리고 오가던 그 길에서 아이들은 참 많은 말을 흘렸다. 유치원 들어갈 무렵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등하원을 손수 한 덕분에, 나는 그 말들을 놓치지 않고 주울 수 있었다. 회의실에서는 절대 못 들을 문장들이었다.

책상 위에 흩어진 파스텔 컬러칩과 마커
→ 어떤 컬러칩보다 정확했던 한마디, 구름색.

그리고 몇 달 뒤. 다음 시즌 파스텔 컬러를 짜는데 이상하게 다 밋밋하고 거기서 거기 같았다. 답답해서 옛 노트를 뒤적이다 그 페이지를 다시 만났다. 구름색. 그 한마디가 내가 정리해둔 어떤 컬러칩보다 정확하게 내가 찾던 톤을 말하고 있었다. 결국 그 시즌 팔레트 이름 하나에 그 말을 그대로 붙였다.

"정리된 자료는 정보를 남기지만,
뒤죽박죽인 노트는 순간을 남긴다."

다듬지 않아서 남는 말

지금 그 딸은 중1이 됐고, 이제 "부드러운 색"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브랜드 이름을 콕 집어 말하고, 엄마 옷은 촌스럽다며 웃는다. 그래서 그 시절의 말들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다듬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정확했던 말들. 그래서 나는 노트를 깨끗하게 다시 옮겨 적지 않는다. 일 메모와 아이가 흘린 말이 뒤섞여 있어야, 나중에 우연히 다시 펼쳤을 때 그때의 온도가 그대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오늘도 끄적인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노트 아무 데나 손 가는 대로 적는다. 회의 안건 옆이든 일정표 뒤든 상관없다. 지금도 매일 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그 길에서, 언제 또 어떤 한마디가 툭 떨어질지 모르니까. 언젠가 또 누가 "이건 무슨 말이에요?" 하고 물어올 테고, 그럼 나는 "글쎄, 그땐 그냥 적어뒀지" 하며 웃겠지. 그리고 속으로 조금 기대할 거다. 이 끄적임이 다음엔 또 어떤 색이 되어 돌아올지.

hhee 오늘도 노트 귀퉁이에 한 줄 적고